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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중국] 아! 광복!…상하이 임시정부를 다시 가다

기사입력 2023-08-13 13:00

기자의 아버지는 1945년생, 소위 해방둥이다. 나라가 빛을 되찾은(光復) 때에 맞춰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 여든에 가까워지면서 흰 머리가 수북해지신 걸 보면 대한민국이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뒤로 얼마나 오래 또 치열한 시기를 거쳐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수도 베이징이 연일 40도 안팎의 무더위가 이어지던 지난달에 주말을 이용해서 상하이를 잠깐 다녀왔다. 임시정부청사를 다시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입구에 안내 동판이 붙어 있어서 찾기 쉽다. / 사진 = MBN 촬영
↑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입구에 안내 동판이 붙어 있어서 찾기 쉽다. / 사진 = MBN 촬영


상하이 ‘핫플’ 신천지 거리에 있는 임시정부청사 유적지


사실 기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지 3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인 1996년 초에 베이징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1년여를 살았던 경험이 있다. 그때 상하이도 왔었고, 당연히 임시정부청사도 들렀다. 하지만, 아직 10대였던 그 시절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 중 하나였을 뿐 기억 속에선 큰 인상이 남아있지 않았다.

27년 만에 다시 찾은 임시정부청사는 기억 속의 그곳과 너무 달랐다. 주변은 상하이에서 소위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신티엔띠(新天地) 거리였다. 대형 쇼핑몰과 주변 카페에는 잘 차려입은 각국의 사람들이 여유 있게 차를 마시거나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예전엔 오래된 건물들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번화가 건너편 초라한 건물…그곳에서 펼쳐진 애국지사들의 사투


그렇게 길 건너 노천카페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는 왜 그렇게 작아 보이는지. 이렇게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애국지사들이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걸고 투쟁을 펼쳤다고 하니 보는 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전시실로 들어가는 과정도 씁쓸했다. 매표소에서 요금을 내고 전시관을 가려면 다시 나와서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철창문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 전시관 보호 차원이라고 하지만 볼품없는 쇠창살을 밀고 들어가야 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임시정부청사 전시실을 가려면 표를 산 뒤 매표소 옆 철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창살 안으로 들어갈 때 왠지 기분이 묘하다. / 사진 = MBN 촬영
↑ 임시정부청사 전시실을 가려면 표를 산 뒤 매표소 옆 철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창살 안으로 들어갈 때 왠지 기분이 묘하다. / 사진 = MBN 촬영


첫 전시실인 회의실부터 집무실, 침실, 식당과 주방 등 100여 년 전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엔 사진과 영상, 글 자료들을 통해서 우리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활약상들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한국 청년들이 전시실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관람하는 걸 지켜보면서 무슨 대화를 하나 가만히 귀 기울여도 봤다. “교과서에서 배운 적 있다”며 “실제로 와서 보니 신기하다”는 반응들이 주를 이뤘다. 체험 학습이 이래서 중요한가 보다.

임시정부 유적지는 가장 오랫동안 유지됐던 상하이 외에도 중국 내에 여러 곳에 있다. 해방 직전 마지막으로는 충칭(重慶)에 청사가 있었다. 그곳들을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한 이 순간만큼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마음만은 느껴보려고 부단히 애를 써봤다.

백범의 흉상과 태극기가 걸려 있는 전시실. 내부 촬영 금지지만,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 전시실 첫 장소만 살짝 한 컷 찍었다. / 사진 = MBN 촬영
↑ 백범의 흉상과 태극기가 걸려 있는 전시실. 내부 촬영 금지지만,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 전시실 첫 장소만 살짝 한 컷 찍었다. / 사진 = MBN 촬영


임시정부청사 앞을 지날 때 발걸음을 멈추면 어김없이 한국인들


임시정부청사 유적지를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상하이 시내 한복판에서 임시정부청사 유적지를 둘러보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한국인이었다. 일반적인 중국 사람들에게 이곳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장소일 테니까 말이다.

100여 년 전에도 그랬을 터이다. 열강의 침략을 당하던 당시 중국도 어느 정도 동질감은 느꼈을 터이지만, 아예 나라를 빼앗긴 우리네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이 이 작은 건물에 모여서 나라를 되찾겠다고 하니 당시 중국 사람들, 그리고 그 중국을 차지하겠다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서양 사람들 눈에는 그분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길 건너에서 바라본 임시정부청사 건물. 상하이 번화가 한복판에 서 있는 허름한 건물을 지켜보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 사진 = MBN 촬영
↑ 길 건너에서 바라본 임시정부청사 건물. 상하이 번화가 한복판에 서 있는 허름한 건물을 지켜보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 사진 = MBN 촬영


중국 내 항일 유적지들 석연찮은 이유로 휴관 잇따라


그런데 최근 중국 내 항일운동 유적지들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우리의 무관심과 중국의 관리 소홀, 때로는 국제정세와 맞물린 현상 때문이다.

다롄(大連) 뤼순(旅順)감옥 박물관의 안중근(安重根) 의사 전시실과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롱징시(龍井市) 윤동주(尹東柱) 시인 생가는 내부 수리를 이유로 장기간 닫혀있다. 또 베이징 시내에 있는 이육사(李陸史) 선생이 옥고를 치르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 감옥 건물은 2년 전만 해도 접근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리모델링 되며 옛 모습을 찾기 힘들뿐더러 일반인 주거지가 되면서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2년 전까지 지하 감옥의 형체를 유지했지만, 그 뒤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면서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 / 사진 = 연합뉴스
↑ 2년 전까지 지하 감옥의 형체를 유지했지만, 그 뒤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면서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 / 사진 = 연합뉴스


중국 당국은 “단순 내부 수리일 뿐”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나라가 워낙 커 전체를 뺏기지 않았을 뿐이지 중국 사람들도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인데, 아무리 한중 관계가 경색됐다고 해도 중국 내 항일 유적지를 일부러 닫아놓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긴 싫다.

하지만, 냉각된 한중 관계 속에 중국 측에서 어떤 의도를 갖고 우리 국민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또 애써 시간을 내 그곳에 갔다 닫힌 문을 보고 발걸음을 옮기며 아쉬워했을 우리 국민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럴 때일수록 지혜를 모아서 양국 관계와 항일 유적지를 더 잘 지키고 가꿔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과거 자신을 희생해 조국과 민족을 되살린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지켜야 하는 후손들이니까.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했던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방명록이 차례로 걸려 있다. / 사진 = MBN 촬영
↑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했던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방명록이 차례로 걸려 있다. / 사진 = MBN 촬영


[윤석정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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